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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37

달, 밤 은행나무 가로수에 가로등불이 달처럼 걸렸다. 달이구나, 했다. 한 번 보고 한참 걷고 다시 보고, 그러고 걸었다. 가로등불보다 작고 덜 환하지만 달은 달, 진득한 달이 잘 따라오나 달을 잘 따라가나 하늘을 바라고 걸었다. 미지근한 밤공기가 살에 닿는다. 기온만큼 더 걸으려고 발을 딛는다. 나는 조금은 더 기운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땅을 더 힘차게 박차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달밤에 바람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싶어졌다. 오로지 내 발로 바퀴가 구르는 기운이 마음에 들었다. 땅으로 스민 기운이 두 발을 뿌리로 삼아 내게 다시 스며들었으면 싶었다. 2016.6.21. 2016. 6. 22.
떠나온 사람에게만 돌아갈 곳 있으니 허약한 뿌리가 어쩌면 어느 곳이든 발 딛고 사는 동력일 수도 있었다. 떠나온 사람에게만 돌아갈 곳 있으니. 하림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 순서를 생각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돌아갈 곳이 없어서 떠나는 걸까. 무엇이 먼저일까. 닭과 달걀 같은, 그런 생각들. 버스를 탔고 익숙한 곳을 에둘러 비껴난 길을 지났다. 창밖을 훑다가, 노래와 풍경의 간극처럼 발딛은 곳이 가깝고 또 멀었다. 2016.5.28. 2016. 5. 28.
풍덩 빠지지 못했다. 스폰지하우스가 문을 닫았다. 정 붙인 곳들이 손에 꼽혀서일지 오래 허했다. 아끼는 것들은 왜 자꾸 사라질까. 퇴근길에 들를까 하다 몇 번 발을 돌렸던 일을 후회했다. 더 아끼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 발을 돌리는 길이 적적했다. 정을 너무 붙이지 말라고도 하고, 그럼에도 충분히 사랑하라고도 하고. 사라지는 것을 두고, 마음을 보호한다는 여러 방법들. 그럼에도 편으로 마음이 기운다. 서둘러 마음을 떼는 일은 서글프다. 쓸쓸하다. 아프다. 그럼에도 기울지 못하고 산다. 사람을 공간을 마음을 잃지 않고 싶은데 겁이 많아 풍덩 빠지지 못했다. 얕은 물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마음이었다. 잃어버린 영화관을 생각하다가 어쩐지 마음을 들킨 것도 같아 부끄러웠다. 얄팍한 마음을 못 견디는 날이 있었다. 바다 대신 청계천.. 2016. 5. 20.
균형을 찾는 일 며칠 전 전통자수를 잠깐 배웠다. 패랭이꽃을 수놓으며 자련수, 이음수, 씨앗수, 사선평수, 가름수, 풀잎수, 고운 이름들을 얻었다. 롱앤숏스티치나 프렌치노트라거나, 책에서 본 이름들의 본딧말을 찾은 것 같았다. 다른 말을 써도 같은 손놀림에, 이 나라도 저 나라도 살아가는 일은 똑같구나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랜 사람들의 손끝을 한참 헤아렸다. 사는 일이 무얼까. 듬성듬성하게 있어도 괜찮을까. 어느 균형을 찾고 싶었는데 기우뚱 갸우뚱 하며 산다. 답할 사람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물음을 쥐고 살아 그런가 보다. 균형을 찾는 일을 대신해서 걷거나, 무엇을 쓰고, 만든다. 시간이 필요하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멍하거나, 때때로, 그냥. 여름을 앞에 두고 이른 봄 생강나무를 그렸다. 꽃을 더 피울까 하다가 듬.. 2016. 5. 12.
광합성 게스트하우스 손님과 우연히 또 만나 친구가 됐다.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가 어떤 모습일 때 스스로 예쁘다 생각해요, 질문을 받았고, 그러게요, 언제일까요, 서로 웃다가 둘 다 답을 못했다. 그러게, 언제일까. 혼자 남아 곱씹었다. 볕을 쬐다가, 초록색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소낭밭에 앉아 광합성 한다며 재잘거렸던 어린 날을 생각했다. 푸르딩딩하고 짜리몽땅한 게 꼭 너희라고 동백나무를 말하던 지리 선생님도 생각이 났다. 파릇한 양말을 벗 삼아 풍경에 스몄다. 예쁘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돌아보면 예쁜 날이 있었고,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져서 이 시간이 예뻤다. 2016.5.7. 2016.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