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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37

겨울은 종이를 많이 만지는 계절이었다. 건조한 손이 종이를 만지니 베이고 트고 허옇게 일었다. 수시로 크림을 발라도 윤기도 물기도 종이가 다 먹는가 보았다. 칼에 베이듯 찬바람에 종이에 툭툭 터졌다. 천 개의 눈, 천 개의 손을 닮은 삶을 살고 싶었는데, 엉뚱하게도 서너 개의 서류 도장을 손 마디마디 끼우고 찍으면서 물리적으로 천 개의 손을 갖고 싶었다. 닮고 싶은 이유와 갖고 싶은 이유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 부르튼 손을 쥐고 천 개의 손을 바라는 겨울이, 해마다 늘 더디게 갔다. 문득, 열아홉 겨울, 첫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가게 옆집 아주머니가 손을 보자마자 너는 손이 미워서 시집 못 간다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말 뒤에는 그러니 손관리 잘해라 하는 걱정이 담겼겠지만, 생각해보니 십 년이 넘은 지.. 2016. 3. 2.
아지트 1. 어쩌다보니 우문하우스에 여러 차례 묵는다. 마을길이 조금씩 눈에 익는다. 게스트하우스인데도 시골 친척집 다녀오는 기분도 든다. 마을 가게에서 춘천에 사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빙긋 웃었다. 마을 분위기에 스며드나 보다. 정이 들겠다. 우문하우스에서는 우문(愚問)을 뽑는다. 질문에 답하고, 질문을 담는다. 어리석을 우(愚)는 마음과 에둘러간다는 뜻이 합쳐졌다. 어리석다기보단, 우직한, 느리게 가는 뜻이 마음에 든다. 우문은 느린 물음이다. 느리게, 오래 생각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좋다. 어젯밤 뽑고 침대에 돌아와 한참 생각을 하고 일기를 썼다. 아침에 메일을 보내다가 봄이 오면 아지트로 삼을 곳이 하나 생각났다. 질문 덕에 답을 얻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넣고 올까 또 생각이 많아졌다. --------.. 2016. 2. 28.
필사하는 겨울 12월부터 2월 마지막 주 어제까지 열 번의 필사모임이 목요일 저녁마다 열렸다. 한 주를 빠지고 아홉 주를 채웠다. (개근을 못 해서 아쉽다.) 책을 읽고 쓰고 낭독하며 잔잔하고 따뜻한 밤을 맞았다. 여러 날의 밤 덕분에 마음에 온기가 스몄다. 별스럽지 않아도 여러 날의 흔적들로 나는 어딘가 발을 붙이고 지내는 것 같았다. 이 겨울이 괜찮았다. 끄적이는 일이 좋아 소설도 시도 산문도 노랫말도 혼자 좋은 대로 베껴 적었다. 세 달 사이 공책이 거의 찼다. 틈틈이 찍은 사진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디든 꼭꼭 포개두고 싶었다. 글씨 안에 겨울이 들었다. 종이를 매만지며 고마운 겨울을 오래 생각했다. 마음이 지난날보다 조금은 더 단단하다. 봄을 잘 맞을 수 있을 것 같다.2016.2.26. 백석의 선우사,시를 외고 .. 2016. 2. 27.
담박(淡泊) 1. 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은 淡泊, 단어가 좋다고 했다. 맑을 담. 머무를 박, 배댈 박, 그리고 잔물결 백. 담백하다고 보통은 많이 읽는데 박으로 읽을 때 뜻이 좋아 부러 담박이라고 읽는다고 했다. 열일곱 살, 한문 시간 대부분을 졸면서 보낸 것 같은데 이날의 수업은 눈에 지금도 선하다. 담박한 사람. 담박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다닥다닥 붙은 것이 너무 많았다. 2. 마당에 앉아 볕을 쬐다가 손에 눈이 닿았다. 툭 터지고 아물며 생긴 손의 흉터들을 보다가, 상처와 딱지와 흉들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을 하다가, 부끄럽다고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한문 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불거지고 붙은 것들이란 부끄러운 걸까.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을까, 나는. 3. 실레마을에서 다섯 날을 살았다. 여덟 시면 일어나.. 2016. 2. 10.
김유정역, 실레마을 보름 전, 오래된 필름 사진을 보다가 김유정역 사진에 마음이 닿았다. 1월 마지막 날에는 경춘선을 타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다짐까지 할 만큼 큰 일도 아니었지만, 움츠러든 때에 다짐이 거듭 필요했다. 생각한 다음날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고, 그 다음날 휴가원을 미리 냈다. 한동안 잘 쉬지 못했다. 일보다도 실은 건강하지 못한 책무감과 불어난 생각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2016.1.29. 긴 정산 일을 마치고 하루 연차를 쓴 날. 열한 시까지 늘어지게 잤다. 느지막히 나와 서강대역에서 상봉역으로, 김유정역으로 경의선에서 경춘선을 갈아탔다. 두 시 넘어 김유정역에 내렸다. 우문하우스로 가는 길, 강아지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쓰담쓰담 예뻐하고 있는데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와서 왜 고모한테는 가고 우리한테는 안.. 2016.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