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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어제와 오늘

아지트

by 리을의 방 2016. 2. 28.

1.
어쩌다보니 우문하우스에 여러 차례 묵는다. 마을길이 조금씩 눈에 익는다. 게스트하우스인데도 시골 친척집 다녀오는 기분도 든다. 마을 가게에서 춘천에 사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빙긋 웃었다. 마을 분위기에 스며드나 보다. 정이 들겠다.

우문하우스에서는 우문(愚問)을 뽑는다. 질문에 답하고, 질문을 담는다.

어리석을 우(愚)는 마음과 에둘러간다는 뜻이 합쳐졌다. 어리석다기보단, 우직한, 느리게 가는 뜻이 마음에 든다. 우문은 느린 물음이다. 느리게, 오래 생각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좋다.


어젯밤 뽑고 침대에 돌아와 한참 생각을 하고 일기를 썼다. 아침에 메일을 보내다가 봄이 오면 아지트로 삼을 곳이 하나 생각났다. 질문 덕에 답을 얻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넣고 올까 또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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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낸 메일.


안녕하세요.
어젯밤 우문하우스에 놀러왔다가 질문 쪽지를 받고 답장을 드려요. 잊고 계셨을 것도 같아, 제 메일에 놀라실지도 모르겠어요. 
아지트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할까 한참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곳 얘기를 할게요. 고궁 산책을 좋아해요. 작년 늦가을에 덕수궁에서 좋아하는 자리를 찾았는데 바로 추워져서 잘 가질 못했어요. 정관헌이라는 근대건물인데 그 뒤로 돌아가면 후미진 돌계단이 나와요. 건물 뒤라 사람도 없고 가로등불도 은은하고 가만히 앉아있기 좋았어요. 고궁을 좋아하고, 고궁 어느 집들의 뒤를 좋아해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구석 한모퉁이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요. 이날도 여기 계단에 혼자 앉아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밤이 될 때까지 앉아있던 기억이 나네요.
봄날이 되면 다시 가서 오래 앉아 책도 보고 노래도 듣고 그러려고요. 아직 두어 번 간 곳이라 아지트라기는 그렇지만, 쓰다 보니 여길 아지트 삼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것저것 생각할 질문을 던져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질문자님의 아지트는 어디일까도 참 궁금해지네요. 


201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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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기


아지트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할까 생각하다가, 나는 아지트를 아직 못 찾았는데 싶다가, 매일 스치는 아현동 생각을 했다.

이대역이든 웨딩타운이든 별 차이는 없는데 아현역 환승정류장에 내리면 오래된 미싱집이 눈에 익었다. 출근길, 아현동에 내려 굴레방미싱부속을 마주하고 앉아 171 버스를 기다리는 십 분이 별스럽지 않아도 좋았다. 눈높이에 닿는 묵은 가게들이 눈에 점점 익었다.

퇴근길, 다시 171 버스를 타고 두세 정거장 일찍 내려 왼쪽을 걸으면 구남문짝, 한성문짝, 입에 짝짝 붙는 이름들이 눈에 들었다. 해묵은 간판에 정이 붙었다. 신촌에 살면서 신촌보다 그리로 잇는 길을 나는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봄. 이사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 살아야 할까 하다가, 어디에 발을 딛고 살까, 잘 살고 있을까, 묵직한 생각으로 가지를 친다.

휘적휘적 걸을 곳에 아지트를 두고 살면 좋겠다. 집으로 갈 때 빙 둘러가는 익숙한 길 하나, 늘어질 수 있는 단골가게 하나 두면 좋겠다.

결국은 처지에 맞추어 가겠지만서도. 아직은 두지 못한 푸근한 곳 하나쯤 생각하고 있으면 마음이 느슨해졌다.

어디로 갈까. 어디에 붙을까. 어디에 숨겨둘까.

201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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