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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어제와 오늘

by 리을의 방 2016. 3. 2.
겨울은 종이를 많이 만지는 계절이었다. 건조한 손이 종이를 만지니 베이고 트고 허옇게 일었다. 수시로 크림을 발라도 윤기도 물기도 종이가 다 먹는가 보았다. 칼에 베이듯 찬바람에 종이에 툭툭 터졌다.

천 개의 눈, 천 개의 손을 닮은 삶을 살고 싶었는데, 엉뚱하게도 서너 개의 서류 도장을 손 마디마디 끼우고 찍으면서 물리적으로 천 개의 손을 갖고 싶었다. 닮고 싶은 이유와 갖고 싶은 이유는 하늘과 땅처럼 멀었다. 부르튼 손을 쥐고 천 개의 손을 바라는 겨울이, 해마다 늘 더디게 갔다.

문득, 열아홉 겨울, 첫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가게 옆집 아주머니가 손을 보자마자 너는 손이 미워서 시집 못 간다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말 뒤에는 그러니 손관리 잘해라 하는 걱정이 담겼겠지만, 생각해보니 십 년이 넘은 지금도 말처럼 살고 있어서, 어린날과 그리 멀어지지 않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아주머니, 잘지내고 계실까. 그리고 나는 말이다. 어른의 손으로, 잘 지내고 있을까.

손이 꽤 아물었고 깨끗해졌다. 손이 헐고 나으며 계절이 몸과 마음에 드나든다. 삼월이 되었다. 두 손에도 봄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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