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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아이들 곁, 2006~2015

2008.12. 첫마음, 그리고 다시 첫걸음

by 리을의 방 2015. 12. 22.

실무자란 이름을 얻게 된 지 이 주 남짓 지났다. 아직까지 나는 이곳에 아이들과 놀려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잔소리 한 짐 풀어 놓으려고 오는 것 같다. 한 아이는 “쌤, 용 됐어요!”라고 직설적으로 축하하고, 또 한 아이는 진급(?)했으니 사무만 하고 교실에 들락거리지 않을 거라며 좋아한다. 자원교사에서 실무자라는 변화가 아직은 부담되고 낯설다. 전처럼 자원교사로 아이들과 놀면서 지냈으면, 하고 철없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한참 어린 듯싶다. 더욱 더 멋스럽고 다감하고 위트도 있고 자신감도 넘치는 그런 사람이 돼서 짠, 하고 다시 등장하고 싶었는데, 어수룩하기만 한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오늘도 여전히 부끄럽다.


2005년 10월, 좁고 어두침침한 골목, 옆 교실의 수업이 생생하게 들리는 작은 교실에서 자원교사 활동을 시작하면서 ‘아름샘’이란 이름을 얻었다. 방울 같은 아이들 대여섯 명 앉혀 놓고도 부끄러워 빨개지는 얼굴 걱정, 긴장해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걱정,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걱정, 수업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걱정, …… 이곳에서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걱정으로 다가올 즈음, 샘이란 호칭은 선생님보다 한결 가볍고 다정했으며 어수룩한 내 모습을 조금은 용서해주는 듯했다. 걱정은 여전히 계속됐지만 아름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익숙해지면서 아이들의 얼굴이 마음에 다가왔다. 아이들과 맺은 첫마음이었다. 그 마음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국어 시간을 기다리며 설레고, 당황스런 질문을 해도,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아도, 빨리 끝내 달라고 칭얼거려도 아이들 하나하나가 그 모습 그대로 참 예뻤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눈을 맞춰주고 대답을 해 주면 그야말로 감격스러웠고, 아이들과 옥신각신하며 오갔던 이야기들을 마음에 차곡차곡 채워두었다가 학교 강의실에 앉아 하나씩 떠올리며 혼자 빙긋이 웃기도 했다.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서툰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일 년을 보내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면서 또 일 년을 보냈다. 나름 베테랑 샘이 됐다 싶어 잔소리하고 꿀밤 먹이며 아이들을 쫓아다니다 보니 또 일 년이 지났다. 그렇게 자원교사로 삼 년을 보내고 사 년 째, 이젠 대학 졸업도 하고 오래 머무르진 못하겠구나 싶어 쓸쓸한 마음을 덮어두고 있을 때 실무자 제의를 받았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을 헤아리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나눈 오랜 마음도 계속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예쁜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과 경험과 마음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어수룩하지만 여전히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는 내게 아이들은 매일 얼굴을 마주해도 사랑스러운 제자들이고,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을 입혀 주는 멋진 친구들이자, 내가 지닌 장점과 단점을 일깨워주는 내 선생님이기도 하다. 혼을 내고 벌을 세우다가도 결국은 피식 웃게 만드는 귀여운 아이들이고, 그 안에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생각들이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가능성을 밖으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운 아이들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품어줘서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아이들이며, 환한 웃음 뒤 웅크리고 있는 슬픔을 언제까지나 어루만져주고 싶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 또한 큰 기쁨이지만, 이곳에서 나 또한 웃음을 찾고 보다 너그러워졌으며 공감하고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많은 대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이를테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타인을 이해해야 하는지, 왜 꿈이 있어야 하는지, 왜 삶이 소중한지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말하거나 길을 제시할 수 없어서 부끄럽기만 했다. 아직은 아이들 앞에 어른으로 서기엔 나이가 어리고, 내가 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어서 아이들을 더 단단하게 지지하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가는 한 지점에 서 있는 내가 아직은 많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 이제 실무자가 되면서 아이들의 환경을 전반적으로 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원교사로 활동하면서도, 지금 이 위치에서도 내가 여전히 해야 할 고민은 힘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힘을 찾고, 그 힘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의 방법을 찾아야 하며, 관념만 품고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행동해야 한다. 청자에 처음 왔던 그때처럼 아이들에 대해,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다시금 알아가고 새로운 꿈들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변했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샘, 예뻐졌어요.’와 같은 기분 좋은 소리라면 좋으련만, 괴팍해지고 사악해졌다는 맘 아픈 소리뿐이다. 청자에 다닌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는 매일 잔소리나 하면서 벌만 주는 선생님으로 비춰지고 있을 듯하다. 칭찬하는 선생님보다는 잔소리쟁이 선생님에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첫마음을 찾아야 할 때인 것 같다. 다사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어주고, 단점보다는 가능성을 더 많이 찾아주며, 꾸중보다는 칭찬을 많이 하는 선생님, 그렇지만 5분 전에도 아이에게 결석했다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첫마음 찾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배울 때, ‘긍정적 전이’라는 용어를 배웠다. 한 학습의 효과가 다른 학습을 촉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에게 긍정적 전이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늘 아이들에게 스스로가 존중받는 존재임을 알게끔 하고 싶다. 이곳에 오는 선생님들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그 든든함과 따스함이, 아이들이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게 되는 데에 밑거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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