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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어제와 오늘

필사

by 리을의 방 2016. 1. 5.

책을 베껴쓰는 일을 좋아했다. 마음에 닿는 문장을 꾹꾹 눌러쓰며 베끼다 보면 그 문장들이 내것이 된 것 같았다. 문장을 오래 매만질 수 있었다. 내가 문장이 된 것 같았고, 나도 그런 문장을 만들고 싶었다.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오후면 허정허정 걷다가 봄이나 콩삼이나 왓집에 가서 좋아하는 커피에, 좋아하는 문장에, 한 주를 맺고 한 주를 충전했다. 한 주의 작은 외출이 꽤 힘이 됐다.

 

지난 겨울부터 일 년을 손을 놓았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에 틈이 잘 생기질 않았다. 쉬는 날이면 겨울잠 자듯 긴 잠을 잤다. 철이른 겨울잠 속에서 나는 더 조용해졌고 말도 생각도 글도 잃은 것 같았다. 겨울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책읽는지하철의 홍대필사모임에 들었다. 필사는 베껴쓰기와 같은 말인데도 어딘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두 주 사이, 산문집 하나와 소설책 하나를 읽었고 이따금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적기도 하면서 자기 전 틈을 만들어갔다. 목요일 밤이면 여럿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장을 꾹꾹 눌러쓰고, 내 문장을 읽고, 사람들의 문장을 들었다. 합정에서 신촌까지 꾹꾹 밟으며 걷는 길까지 좋았다. 마음이 간질거리는 목요일이 점점 더 좋다.
내가 아끼는 일들을, 내가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끼는 말들을, 사람을, 공간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는 추웠고 백석의 시가 좋았다. 공책에도 마음에도 꾹꾹 눌러담았다.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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