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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어제와 오늘

by 리을의 방 2016. 10. 23.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 찬비가 후두둑 후두둑 굵다. 고양이 밥을 챙기러 잠깐 사무실에 왔다. 금요일에 그릇 가득 사료를 붓고 통조림도 열어주고 퇴근했는데 하루를 건너뛰고 오니 설거지한 것처럼 그릇이 깨끗했다. 비가 오니 어제 오지 못한 일이 더 미안해졌다. 기다리는 친구들은 오지 않고 비는 더 후두둑 내린다. 고양아, 고양아. 어디서 헤매니. 밥은 먹었니. 비는 잘 피하니.

지하철역 앞에서 빗길에 비둘기 둘이 무슨 공을 차며 노나 했다. 가까이 보니 삼각김밥을 둘이서 콕콕 쪼아 먹고 있었다. 버려진 것일지 누가 주었을지 제 몸의 반만 한 밥을 필사적으로 먹었다. 거리에서, 도시에서, 길의 동물들이 사는 방법. 아니 살아남는 방법. 사무실을 찾는 길고양이들이 짧게나마 다가오는 것도 곁을 내어주고 밥을 얻으며 생존하는 방법일지 모른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면 같이 깜박 하는 고양이의 눈인사가, 고마우면서도 애잔하다.

해가 일찍 기울고 밤이 금세 온다. 할일이 남기도 했지만 마음이 붐비면 사무실에 가만히 혼자 앉는 밤이 잦았다. 그 밤들에 고양이가 왔다.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마주하는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드나들어도 괜찮다 문을 열어두면 일하는 새에 조용히 들어와 책상 옆에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눈이 닿으면 늘 앉는 현관 앞으로 가서 옹크리고 간식을 기다렸다. 불 꺼진 사무실 방들을 설렁설렁 기웃거리기도 했다. 잠시 쉬러 온 고양이의 곁에 앉아 붐비는 마음을 내려두었다. 밥 한 끼를 챙기고서 너무 많은 마음을 내려두었을까 생각도 했다. 오물거리는 입을, 숨 쉬는 동그란 등을, 연둣빛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막막하고 먹먹한 밤도 잔잔해졌다.

그리고 눈이 하늘빛인 새 친구가 왔다. 하얀 털이 더 많고 배가 불룩했다. 해가 저물면 찾아와 밥을 오래 먹었고 작은 움직임에도 깜짝 놀랐다. 둘이 싸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들 사이 배려일지 질서일지 서로 다른 때에 찾아와 밥을 먹고 쉬다 갔다. 고양이 집은 새 친구가 썼고 밥도 있던 친구의 몇 배를 먹었다. 늦은 때에 와서 오래 밥을 먹다가 기지개를 쭉 펴고 다시 한참을 앉아 밥을 먹고 갔다.

밤이 차다. 겨울이 곧 오겠지. 잠시라도 들어와 쉬라고 열어둔 문도 닫아야 할 때가 곧 오겠다. 신경 써서 챙겨도 밥과 물이 꽁꽁 얼 겨울밤도 오겠다. 사람의 도움으로 겨울을 나고 또 그러지 못할 매서운 날도 마주할 친구들에게, 가까워지는 일이 혹시 더 해가 되진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가깝게 다정한 곁이 되고 싶었다. 섣부른 마음이 되지 않으려 또 조심스럽다.

곁에 오는 고양이들의 등을 가만가만 살피는 시간이 고맙다. 나의 약한 밤들에 고양이와 만나 다행이다.

 

201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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