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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아이들 곁, 2006~2015

2011.12.22.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기

by 리을의 방 2015. 12. 23.
2008년 12월이었다. 자원교사로 활동하다가 진급했다고 아이들에게 나름의 축하를 받으며 실무자가 되었다. 처음 마주한 회계서류에 도장을 죄다 거꾸로 찍는 실수부터 시작해서, 한계상황만 매일 마주하는 내가 너무 답답해 머리를 쥐어뜯던 그때. 그리고 삼 년이 지났다. 도를 닦아야겠다고 머리를 쿵쿵 찧는 일은 여전하지만, 아이들과 옥닥복닥 부대끼며 지내는 사이, 아이들도 자랐고, 나도 함께 자랐다. 

국어교사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우려 반, 호기심 반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겐 이 일을 택한 이유가 중요한데,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만을 물어보았다. 교육을 매개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좋았다. 그렇지만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조금은 더 다양한 영역과 방법으로 아이들을 지지하고 싶었다. 가장 갑갑하고, 짜증도 나고, 혼란스러울 시기를 마주하고 있을 아이들 곁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었다. 청소년 시기가 내겐 참 중요했고 또 버거웠지만 많은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지냈다. 어쩌면 그 시절 채우지 못한 내 마음을 투사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해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인내하는 역할은 즐겁게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고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잘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다. 감정 표현이 솔직해서, 때로는 솔직함이 너무 강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그렇지만 매선 말을 뱉고 돌아온 반응에 다시 상처받아, 또다시 매선 말을 뱉는 아이들. 불안한 마음에 사람을 떠보기도 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면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편안함에 긍정적인 감정과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마저도 마구 꺼내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꺼내놓은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면 사람에게 마음을 닫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청소년, 누구에게나 자못 격정적인 시기이다. 지나고 보면 푸릇푸릇하고 꽃처럼 고운 나이이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많은 청소년들이 그렇다. 신뢰가 견고해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아이에겐 그 시간을 기다리고 함께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날선 마음 옆에서 잠시 기다리다보면 실마리가 보이고, 이유가 있었고, 마음이 읽힌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인 서천석 의사의 트위터에서 '못된 아이는 없고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어른이 곧바로 되지 않듯이, 아직 짜증도 투정도 부릴 수 있고, "힘들지", "괜찮아"와 같은 따뜻한 말을 듣고 싶고, 열띤 감정을 터트리고도 싶은 아이들에게 열다섯 살은, 열아홉 살은 무릇 이래야 한다고 청소년의 몸집에 맞추어 규정짓고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청소년자활지원관이 생긴 지 7년이 넘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때론 다투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다보니 이제는 든든한 지원군도 생겼다. 대학생이 된 졸업생들은 자신의 장점을 활용해 방과후 수업을 가르치기도 하고, 전공을 살려 소풍 때 멋진 사진을 찍어주거나 즐겁게 후배들과 놀아주기도 한다. 이제 캠프 프로그램 기획에서는 졸업생들이 빠질 수 없게 되었다. 잊을 법도 한데 군대에 가거나 혹은 휴가 나왔을 때 꼭 들러 인사하는 아이들이 있고, 기관의 어려운 상황을 아이들과 공유했더니 5년째 다니고 있는 학생은 같이 서울에 싸우러 가자고 열을 내어주었다. 얼마 전 퇴근 무렵에는 건물 앞에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걱정해주는 고3 남학생의 문자를 받고, 그 마음이 귀엽고 예뻐서 웃음이 났다. 성장한 아이들이 다시 이곳을 지켜주고 나를 자라게 하고 있다. 별 일 아닌 수다도 깔깔대며 나눌 수 있는 소소한 일상과 이따금 따뜻하게 돌아오는 마음의 반동을 약으로 받으며, 오늘도 나는 기운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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