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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어제와 오늘

조각

by 리을의 방 2016. 9. 22.
1.
천천히 걸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 이모는 기억을 조금씩 놓아가면서 밤거리를 몇 시간이고 걸었다. 그렁거리는 눈으로 답답해, 걷고 싶어, 말하는 얼굴이 나는 시렸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없이 걷고 싶을 때는 한없이 깊은 밤이었고, 나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이따금 허했다.

2.
문득, 비합리적인 경로를 권하는 지도 앱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가장 오래 빙 돌아가는 버스의 번호 같은 것. 비합리적인 시간을 이따금 갖고 싶었다.

3.
밤이 아쉬워 새벽까지 여는 카페에 앉았다. 따끈한 우유로 허기를 재웠다. 내 방은 내 자리가 맞나, 내 의자는 내 자리가 맞나, 이 도시는 내 자리가 맞나, 따위의 생각을 했다. 살아온, 살다온 곳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곳에 살고 싶다 말했다. 말 뒤에서 나도 정착하고 싶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생각했다.

4.
걸을 때 십센치의 노래를 들었고 눈이 오네의 가사가 박혔다. 녹아 없어질까 난 내가 없어질까 난 무서워. 녹아 없어질까를 누가 없어질까로 잘못 들었다. 녹아 없어지는 것도, 누가 없어지는 것도, 나는 무서운 게 맞았다.

5.
이따금 걸어 퇴근을 하면 크고, 거대하고, 소란하고, 무수한 어느 사이들을 지났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일순은 존재가 점이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가사를 잘못 기억하던 것처럼, 어느 때에는 일순이 존재가 점이 되고 싶다고 외치는 장면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점이 되고 싶었고 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도 되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고 무엇으로도 되고 싶은 날이 있었다.

6.
긴 연휴에 혼자 있었고 오늘 처음으로 말을 했다. 설단음처럼 맴도는 생각을 조심스러워했다. 여러 자리에서 파생되는 생각에 나의 말과 자격을 곱씹다 침묵했다. 오늘은 말을 찾았지만 말을 잃은 것도 맞았다. 입이 풀리지 않은 탓이라고 가벼이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내일이 다를까. 자정이 넘었고 잘 모르겠는 시간과 뾰족한 생각이 여전히, 흘렀다.

7.
어느 조각은 크고 작았고 이어졌고 흩어졌다. 이 모든 조각들이 나임을 알고 몰랐다.

8.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벤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밥'이나 '엄마'나 '우리'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 박준, 숲

나는 가난해 가진 말은 밤뿐이지만, 말 하나를 쥐고 숲바람을 맞으러 가고 싶었다.


2016.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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