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쓰고/어제와 오늘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by 리을의 방 2016. 1. 9.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2005.


황만근이 없어졌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면서 있었던 그가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면서도 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소설은 이렇게 어느 날 아침, 황만근이라는 한 사내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황만근은 마을 사람들에게 바보 천치라고 손가락질 받는 인물이다. 어수룩한 외모에 어수룩한 말투, 겉모습만 봐도 영락없는 바보이다. 한 집에 사는 어머니와 아들에게마저 사람 취급 못 받고 방에도 못 들어가 손바닥만한 마루에서 자며,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도 바보이기 때문에, 그의 별명처럼 한 근이 아닌 ‘반 근’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조그만 시골에서, 황만근의 실수는 마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코미디가 되고, 엉뚱한 이의 실수마저도 그의 실수로 돌려 더 바보로 만든다. 보통 사람의 절반 대우밖에 받지 못하면서도, 황만근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이다.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집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길목에 누가 지나가면 큰 소리로 반가이 인사를 하고, 어른이든 아이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굽실거린다.
 
그는 남들에게 없는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고물이 되어 이제는 부품도 나오지 않는 경운기는 그의 손이 아니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용왕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돼지에게 색동옷 입히기도 그가 있어야 가능하고, 소돼지 잡는 일을 해 주고 얻은 고기로 요리를 하면 조미료를 몰라도 자료가 가진 맛을 한껏 뽑아내 ‘희한할세, 바보가.’ 하는 감탄을 듣는다.

황만근은 또 공평무사한 판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마을 공동 분뇨장에서 묵묵히 거름을 삭혀 홀로 있는 노인들에게까지 공평히 나누어주고, 아이들이 놀다가 시비가 붙어도 황만근을 찾아가면 딱히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해결이 된다. 그렇게 황만근이라는 인물은 바보 같으면서도 또 바보가 아닌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곳은 바른 생활 교과서에서부터 예의바르고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정작 어른이 되면 착한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약삭빠르고 눈치를 볼 줄 아는 사람들, 이른바 세상사는 법을 안다 하는 이들에게 착해서 어수룩한 이들은 이용만 당한다. 이용을 당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너무 착해도 세상사는 데 힘든 법이야.’ 하고 말한다. 착해서 슬프고, 바보가 돼서 슬프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슬픈 세상이다. 옳은 길이라고 배운 대로 걸어가면, 다른 갈래의 길로 걸어간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다. 슬픈 세상, 청개구리 같은 세상, 이래서 세상의 모든 혼란이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보 황만근은 세상을 슬퍼하지 않는다. 넉살좋은 웃음만큼이나 그렇게 넉살좋게 살아간다. 정성껏 차린 밥상은 어머니와 아들에게 돌아가고 자신은 대충 쪼그리고 앉아 먹으면서도 막걸리 한 사발에 흥겨워하고, 젊은 시절에 한밤중 산에서 만났다는 거대한 토끼에게 어머니가 팥죽 할마이처럼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빈다. 술에 취하며 아무데다 고꾸라져 자는 자신을 갓 고등학생 된 아들이 발로 뻥뻥 차도, ‘아이고 우리 아들님, 아들님’ 하며 좋아하기만 한다. 

황만근의 그런 넉살이 좋았다. 슬픔은 한번 웃어버리고 나면 그만인 삶의 태도가 좋았고, 사람들의 조롱 속에 외로운 길을 걸어가면서도 외로운 자신이, 또 다른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해 주는 모습이 좋았다. 약삭빠른 사람들을 닮지 않고, 설사 그것이 세상사는 법을 너무 모르는 것이라 해도 자신이 걷는 길이 옳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아름다운 삶이었다. 황만근은 ‘반 근’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만 근’ 취급을 받아야 마땅했다. 

착한 바보 황만근은 또 다시 이용을 당한다. 마을 이장이 농민 부채 궐기대회에 당신 같은 농사꾼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대회날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이장마저도 차를 타고 홱 갔다 오는 둥 마는 둥 하는데 황만근은 원칙대로 그 혼자만 고물 경운기를 끌고 읍내 대회장으로 향한다. 움직일까 말까 하는 경운기를 끌고 겨우 읍내에 도착하지만 아무도 없고, 어머니에게 드릴 자반고등어를 경운기 한 쪽에 묶어두고 털털거리며 돌아오다가 그만 경운기가 논둑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경운기에 실려 있던 막걸리를 마시며 경운기를 지키지만 경운기는 추위와 졸음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지 못했고, 결국 황만근은 일주일 뒤 항아리 하나에 담겨져서 돌아온다. 

바보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돌아간 그의 가치를 알아 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귀농한 지 얼마 안 된 민씨였다. 황만근은 대회에 가기 전날, 민씨와 술을 마시며 말한다.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카이. …… 지 입에 들어갈 양석, 곡석을 짓는 사람이 그 고마운 곡석, 양석한테 장난치겠나. 저도 남도 해로운 농약 뿌리고 비싸고 나쁜 비료 쳐서 보기만 좋은 열매를 뺏으면 그마이가? 내가 왜 빚을 안 졌니야고. 아무도 나한테 빚 준다고 안캐. 바보라고 아무도 보증서라는 이야기도 안했다. 나는 내 짓고 싶은 대로 농사지민서 안 망하고 백년을 살 끼라.”

모두가 바보로 알았지만, 사실 그는 농사꾼으로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았고, 그 순리를 따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말 바보들은, 바보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닐까. 바보 아닌 이들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소설의 끝은 민씨가 이룬 것 없이 다시 도시로 돌아가며 황만근의 묘비명을 쓰는 것으로 맺어진다. 민씨는 ‘선생이 좀 더 살았더라면 만세의 혹염에 그늘의 덕을 널리 베푸는 큰 나무가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황만근이 좀 더 살았더라면 민씨도 신대리에 계속 남아 농사꾼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착한 이가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그는 또다시 상처를 받고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황만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 바보 소리 들으면, 그저 웃어버리면 그만이다. 외로운 길이 될지라도 꿋꿋하게 스스로를 신뢰하고 사람다움을 신뢰하며 걸어가고 싶다. 그늘의 덕을 널리 베푸는 큰 나무는 못 될 지라도, 가지 곧게 뻗고 하늘을 바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다.



'쓰고 > 어제와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졸업  (0) 2016.01.22
김진규, 달을 먹다  (0) 2016.01.09
바람을 쐬고 싶었다.  (0) 2016.01.09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0) 2016.01.09
서촌  (0) 201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