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동네3

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까? 아빠는 밤새 뒤척였다. 2016. 8. 7.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 언 수도처럼 가난했단다 을지로에서 충무로로 꺾는 길, 시그니처타워 앞에는 뼈만 있는 물고기 동상이 있었다. 그앞을 지날 때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의 가시고기를 생각했다. 가시만 남아 물고기의 입으로 들어가면 몸 밖으로 바로 나오던 둘리 친구들과, 슬픈 눈을 꿈벅이던 물고기가 어른거렸다.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 언 수도처럼 가난했단다" 박연준의 시, 빙하기를 읽었다. 쏟아질 수 없어 가난했는지, 가난해서 쏟아질 수 없었는지 모른다. 결핍이 있어 허기진 것일지, 허기져서 결핍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 결빙이란 어느 때가 있는 것일지, 어느 방법이 있는 것일지 희미했다. 허기의 근원을 몰라 물고기는 슬펐을 것이라, 되도 않는 생각을 했다. 시는 너를 그리워하려는데 나의 한 조각이 스르르 결빙되었다 맺었다. 결.. 2016. 7. 17.
김진규, 달을 먹다 2008. “너는 나로 인해 죽는다.” 계절에 따라 크게 네 장으로 나뉘어 있고, 계절과 사람들 마음의 얽힘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까, 계절 이야기를 모토로 시작하여 그 안에는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종횡으로 얽힌 여러 인물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이 소설이 일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너는 나로 인해”라는 책무감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들 삶의 흔적이 새로웠고, 수식이 많은 문장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담박했다. 말을 아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공감했다. 고요한 시간에 호흡을 길게 늘이고 천천히 읽어야 좋을 소설이다. ‘나는 너로 인해’가 아닌, ‘너는 나로 인해’라는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품고 살아간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마음.. 2016.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