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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친구 사무실에 길고양이 친구들이 한 주째 온다. 그전부터 오갔던 걸 이제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동물을 잘 아는 국장님이 밥을 사다주었고, 사무실 식구들이 돌아가며 밥을 챙긴다. 출근할 때, 열두 시에, 서너 시쯤 새참으로, 여섯 시에, 꼬박꼬박 밥 먹으러 온다. 아가들만 조심스레 와서 먹고 가더니 어제는 엄마도 경계를 풀었는지 그릇에 얼굴 박고 폭 앉아 밥을 먹고 졸다 간다. 아가들은 놀고 나무를 타고 밥을 먹고 흙을 파고 똥도 누고 또 앉아 논다. 아가는 아가인지 세상 모든 게 신기한가 보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에도, 날아가는 벌레에도, 동그란 눈을 반짝거린다. 한 팔 거리에 앉아도 이젠 가만히 앉아서, 저 큰 동물은 뭔가 싶은 얼굴로 그 예쁜 눈을 깜박거린다. 일하다 창밖에 오가는 고양이들 살피는 일.. 2016. 9. 24.
꽃토로 2016년 3월, 첫째 꽃토로 이사 덕에 묵혀둔 자투리천들을 찾았다. 작은 친구 하나 두어보려고 장난질했다. 귀를 망쳐 뜯어냈더니 두더지가 생겼다. 꽃토로 만들고 싶었는데, 어쩐지 미안해졌다. 건치를 달고, 귀를 다시 달았더니 도깨비 같아져버렸다. 이게 아닌데. 둘째 꽃토로는 귀를 몸과 한번에 잇고 꼬리를 달았다. 꽃을 입어도 어쩐지 듬직한. 2016년 4월, 셋째부터 일곱째 토토로. 4월은 일 년만에 멩글엉폴장에 놀러갔다. 장난삼아 저 요새 밤에 잠이 안 와 인형 만드는데 들고 갈까봐요, 했고 폴러가 되었다. 독수공방이란 이름 달고 길에 앉았다. 엄마 가방에 다니까 예쁘지 하며 꼬마에게 자랑하는 어머니, 하나를 샀다가 다시 돌아와 나머지가 떨어져 있으면 외롭다며 남은 친구들을 데려간 아주머니. 처음 보.. 2016. 9. 22.
조각 1. 천천히 걸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 이모는 기억을 조금씩 놓아가면서 밤거리를 몇 시간이고 걸었다. 그렁거리는 눈으로 답답해, 걷고 싶어, 말하는 얼굴이 나는 시렸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없이 걷고 싶을 때는 한없이 깊은 밤이었고, 나는 겁이 많았다. 그래서 마음이 이따금 허했다. 2. 문득, 비합리적인 경로를 권하는 지도 앱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가장 오래 빙 돌아가는 버스의 번호 같은 것. 비합리적인 시간을 이따금 갖고 싶었다. 3. 밤이 아쉬워 새벽까지 여는 카페에 앉았다. 따끈한 우유로 허기를 재웠다. 내 방은 내 자리가 맞나, 내 의자는 내 자리가 맞나, 이 도시는 내 자리가 맞나, 따위의 생각을 했다. 살아온, 살다온 곳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곳에 살고 싶다 말했다.. 2016. 9. 22.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사무실에 엄마와 아기 셋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마당에 들어와 밥을 먹고 나무도 탔다. 경계심이 적은 아기는 형제들 밥까지 혼자 다 먹고 아기들끼리 하악거리기도 하고 엄마는 밥도 양보하고 아기들을 살피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가장 작은 아기는 높은 데 오르지 못하거나 담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야옹거렸다. 사무실에는 저녁밥 먹으러 고양이 친구들이 또 놀러와 오도독 밥을 먹고 슬리퍼를 물고 다니며 뛰었다고 했다. 자그마한 친구들을 한참 보면서 따끔거렸던 마음이 몽글거렸다. 2016. 9. 21.
백석, 선우사(膳友辭) 백석,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 4 낡은 나조반에 힌밥도 가재미도 나도나와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무슨이야기라도 다할것같다 우리들은 서로 믿없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긴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탓이다 바람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소리를들으며 단이슬먹고 나이들은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배우며 다람쥐동무하고 자라난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없어 히여젔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없다 그리고 누구하나 부럽지도않다 힌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같은건 밖에나도 좋을것같다 - 조광 3권 10호, 19.. 2016. 9. 21.
아이러니를 배우는 교육적 본질 "문학에서 '아이러니'를 배우는 교육적 본질은 아이러니 그 자체의 용법을 익히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삶의 부조리한 조건들을 이해하기 위함에 있다는 것" (구인환 외, 문학교육론, 47쪽) 2008. 아이들에게 정작 알려줘야 할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정말 부끄러웠다. 2016. 9. 21.
쓸모 비행기에 오르고 내렸다. 먹먹해진 마음을 다스려보겠다고 정류장에 앉아 오고 가는 버스를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아픈 일로 급히 오는 날들이 늘겠다는 생각이 서글펐다. 아픈 일들마저도 무게를 재어가며 가는 일을 고민할 어느 날들이 미웠다. 내가 미웠다.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이 섬 안의 섬으로, 섬 밖의 섬으로 산다. 어린 날은 당신이 밖에, 나는 안에 있었고 커서는 자리를 바꾸어 또 그리 살아간다. 두렵기도 했던, 완고했던 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조금 더 든 아버지는 입원한 사이에 화분에 물을 주려고 집에 다녀왔다 했다. 그 말에 눈은 마주하지 못하고 한참 먹먹했다. 아버지는 조금 더 말이 늘었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누가 아프고 누가 돌아왔고 누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이듦을, 당신이 어.. 2016. 8. 27.
일상을 마주하기 달음질하지 않고 느슨하게 마주하는 오후 네 시. 시간이 풍경이 음악이 낯설다. 제천에서 여름을 다 살고 온 것 같았는데 선풍기를 끌어안아도 더운 서울의 여름이 아직 남았다. 어딘가 낯설다 낯설다 하며 그늘에 몸 붙이고 걸었다. 점심 때 몇 번씩 넋을 놓고 앉았던 카페는 잘 있었다. 한 달만인데도 이름을 기억하는 마음이 고마워서 자리잡고 앉았다. 친구 둘이 어제 내 이름에 적립을 하고 갔다는데, 사무실 식구일텐데 누굴까 누굴까 생각하는 마음이 간지러웠다. 아기가 옹알이를 하고, 사람들이 스터디를 하고, 데이트를 하고,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원두가 갈리고, 웃고, 종알거렸다. 일상의 소리를 곁에서 가만가만 들으며 잠시 넋놓아보는 오후 네 시. 일상 같지 않은 소식을 듣고 멈추었다가 일상이 아닌 일이 어디 있.. 2016. 8. 22.
마음의 반동 바람을 쐬겠다고 일하는 곁에 쫄래쫄래 따라가 빵만 한아름 안고 왔다. 빵집에 같이 가자던 말이 여럿 있었고 말 뒤의 챙김이 나는 고맙다. 혼자 일하는 곁을, 고마운 이들이 말을 건네고 밥을 챙기고 때로는 잠시 머물러 앉기도 하며 채워주는 마음을 안다.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조용히 숨고를 때에, 나누어먹고 눈웃음하고 어깨도 두드리며 오가는 마음의 반동이 약이 된다. 2016.8.8. 2016. 8. 22.
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까? 아빠는 밤새 뒤척였다. 2016.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