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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9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사무실에 엄마와 아기 셋 길고양이들이 놀러왔다. 점심시간에 맞춰 마당에 들어와 밥을 먹고 나무도 탔다. 경계심이 적은 아기는 형제들 밥까지 혼자 다 먹고 아기들끼리 하악거리기도 하고 엄마는 밥도 양보하고 아기들을 살피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가장 작은 아기는 높은 데 오르지 못하거나 담에서 뛰어내리지 못해 야옹거렸다. 사무실에는 저녁밥 먹으러 고양이 친구들이 또 놀러와 오도독 밥을 먹고 슬리퍼를 물고 다니며 뛰었다고 했다. 자그마한 친구들을 한참 보면서 따끔거렸던 마음이 몽글거렸다. 2016. 9. 21.
윤성희, 낮술 그러게요. 사는 게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다녀요. 아빠가 말했다. 그 말에 할머니가 갑자기 아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마치 열 살짜리 손자를 때리듯이. 이놈아. 뭐가 무서워. 아빠는 할머니에게 엉덩이를 맞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더 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까? 아빠는 밤새 뒤척였다. 2016. 8. 7.
상실을 생각했다. 1. 권여선의 소설을 챙기고 나왔다. 첫 문장은 그랬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2. 데몰리션을 보고 왔다. 상실의 한가운데에서, 상실을 말하지 않지만 실은 모두 상실이었던 이야기. 상실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을까. 가끔은 피식 웃기도 하며, 덤덤하게 상실을 마주했다. 삶이 무너지는 증상. 그리고 삶이 무너지지 않으려는 증상을 생각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한다 알고 있었던,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은,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없는, 상실이란 낱말은, 사람은, 시간은, 그랬다. 덤덤히 마주할 수 있는 간극을 나는 갖고 싶었다. 3. 영화가 끝나고 해설을 더한 의사는 글을 씀으로써 감정을 서사화하는 경험을 말했다. 감정을 종렬로 세.. 2016. 7. 15.
상투적이지만 상투적이지만 눈이 펄펄 오는 어느 날 설국을 읽어야겠다고 책을 샀다. 상투라는 것이, 결국은 보편적인 정서에서 온 것일 테니. 상투적으로 눈이 펄펄 오는 날 설국을 가방에 담았다. 눈오는 날은 손편지지 하며 엽서를 담았다. 봄이 온다. 때를 놓쳐 혼자 겨울을 잡아두고 설국을 읽는다. 편지를 쓴다. 눈길을 걷듯 마른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상투적인 표현이 그리운 날이 있었다. 2016.2.16. 2016. 2. 19.
김숨, 바느질 하는 여자 필사모임 여섯째 날. 책 이야기 생각 이야기 사람 이야기 고민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시간이 좋다. 보통 끝나던 시간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긴 이야기에 못 맺은 생각을 혼자 잇다가 두 정거장을 네 정거장 지나서 내렸다. 지나온 만큼 걸었다. 봄이 오셨다는데 아직은 툭툭 터진 손이 아렸다. 베껴쓴 이야기에 사람이 생각나서 속도 조금은 아렸다. 만약에, 조선후기에 내가 태어났다면 삯바느질하고 이야기책 필사하며 생계를 이었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김숨의 바느질하는 여자를 읽는다. 한 땀 한 땀, 곡절이 많은 삶이다. 영천한복 여자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사십 년만에 만났다. 어머니에게 입히려고 활옷을 지었다. 옷은 다 지었는데 어머니의 삼일장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을 잃고 꿈을.. 2016. 2. 5.